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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人 칼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


내 것이 아니라면 잡지 말고 버려라.

어제, 3.1절, 계모임 회원들과 북한산 등산을 계획했다가, 아침부터 눈이 내리는 바람에 ( 안전이 우려되어) 집에서 가까운 파주 월롱산으로 등산코스를 변경했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정말로 환상적인 등산을 체험했다. 정상에 오르자 날이 개었고 등산하기 너무 좋았다. ‘최초 계획대로 북한산을 갈 것을 ...’ 아쉬움이 컸다.

우리는 자기 의지대로 되는 일보다 기대와 반대로 가는 일이 더 많다. 현재라는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는데, 이미 나에게 와버린 고통과 불행을 인정하지 않고 불만을 표시하면 고통만 가중된다. 나의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꺼이 즐겨야 행복하다. 행복은 현재를 즐기는 곳에 있다. 불편한 현재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이미 와 있는 다른 행복이 도망가지 않고, 나에게 오려는 행복이 주저하지 않고 찾아온다. 현재 나에게 다가온 고통은 미래를 밝히는 인생 에너지다.
고통 없는 행복은 없다. 현재의 고통을 행복의 에너지로 인식하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여 즐기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은 미국의 심장 전문 의사 로버트 엘리엇(Robert S. Eliet)의 저서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건강한 삶을 사는 법>에서 나온 명언으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삶의 고통을 줄이고, 적극적으로 살라는 인생 처방전이다. 유한자인 인간에게 흐르는 시간, 선택할 수 없는 대상과의 만남, 기대와 반대로 가는 사건들, 밥벌이를 위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피하려고 하면 더 괴롭고, 비겁해지고, 추해진다. 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피하지 말고 미련 없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누가 부당한 시비를 걸면 상대 우위의 존재가 되어 포용과 용서를 하고, 어두운 일들이 생기면 발전을 위한 시련으로 받아들이면 신상에 이롭고, 행복을 지키는 길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처방전을 살펴보자.


내 마음이, 내 판단이 항상 옳은 것으로 알고서 무수한 불평을 했다. 불평은 나를 투덜이로 만들었지. 불평과 어두움은 나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인간이 하루에 사용하는 언어의 80%가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을 놓고 불평한다고 한다. <누가 어떻고, 00 리스트에 누구누구가 있고, 이 제도는 부자를 위한 것이라며∙∙∙∙∙. 저 사람은 왜 저런데∙∙∙∙. 등> 무의미하고, 내가 조치할 수 없는 일을 놓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산다는 것은 향기로운 꽃길 10 리를 걷기 위해 가시밭길 천리를 걸어가야 한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과 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일들의 연속이다. 방이 추우면 춥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다가온 고통이라면 피하지 말고 일단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숙성시키고, 보다 멀리, 그리고 큰 방향으로 1도만 바꾸면 고통도 행복으로 전환된다. 탈이 없는 행복은 없다.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행동하라. 행동한 만큼 행복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조각가는 자기가 구상한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버릴 것은 버린다. 행복하려면 행복을 만드는 꿈과 행동을 남기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뿌리를 자르고 열매를 기다리는 짓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꿈의 거인도 있지만, 불안과 불행을 만드는 비교하는 여우, 고민하는 좀비, 아집의 곰, 자존심의 늑대가 함께 공존한다.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꿈의 거인이 살아 있으면 불행을 만드는 마음속의 짐승들이 사라진다. 어렵고 힘들수록 꿈의 소화제를 복용하면 고민이 만든 행동불량, 비교와 아집이 만든 열정불량, 자존심이 만든 마음의 위궤양을 치유한다. 꿈의 소화제는 행복의 길을 확장하고, 행동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장애가 없는 행복은 없다. 꿈으로 행복이 길을 막는 고민을 소화시켜라.


일 자체는 즐거운데 일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인간 부딪힘이다. 세상은 더불어 일하는 공간이기에 대인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나의 생각이 안 바뀌는 것처럼 상대의 생각도 굳어 있는데, 나의 잣대와 내 중심으로 상대를 대하면 인간 갈등이 생겨, 일 자체가 고통스럽고 삶의 리듬을 잃는다. 인간 갈등을 줄이고 일을 즐겁게 하려면, 상대를 동반자로 인식하여 상대에게 맞추어 주고, 상대의 장점을 보고,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다'라고 수용하려면 마음의 눈을 뜨는 개안(開眼) 수술을 해야 한다. 인간 활동의 1/3을 차지하는 일(직업, 생업)이 즐거워야 생활 속의 행복이 가능하다. 쉽게 오는 행복은 없다. 괴로운 일도 즐거운 놀이로 생각하자.


일을 하다보면 나보다 우수하고 성공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성공한 자들의 찬치 판에서 박수를 쳐야 하고 성공한 자들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한다.'는 농경문화의 폐쇄적 행위를 지속한다면 퇴보하거나 영원한 낙오자가 된다. 성공한 이들의 마음과 노력을 배우고, 성공 방법을 즐기면서 삶을 한 차원 격상시켜야 행복하다. 지식 산업 사회에서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동료가 먼저 앞서가면 축복하고, 그의 장점을 따라 배우려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낄 때만 행복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은 많은 재주꾼과 인재로 넘치기 때문이다. 나와 잘난 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길을 가라.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축복하고, 다가가서 묻고 배워야 한다. 비교하면 나의 행복이 사라진다. 남의 성공을 나의 성공처럼 기뻐하고 축복하라.



똥과 싸우지 마라.


똥파리가 똥 덩어리에 앉아서 즐거운 식사를 했지. 똥파리가 다리를 비비고 꼬면서 매뉴얼대로

식사를 하는데, 똥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똥파리 너, 매번 식사비도 안 내고 무전도식(無錢盜食)하는데, 너무 경우 없는 짓이다. 이제부터 똥 무더기 당 식사비를 내라.”

이에 똥파리가 굳은 얼굴로 화를 냈어. “배은망덕한 똥 놈아, 악취 나는 네 똥을 분해해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도와주는 나에게 식사비를 내라니. 무슨 계산법이 그러냐? 너의 똥 세계는 장례식을 치러주는 장례사가 장례비를 내느냐? 아무리 버려진 똥이지만 너무도 천박하다.”

똥파리와 똥이 다투는 장면을 지켜보던 말벌이 짧게 말했지. “똥파리야, 똥과 싸우지 마라. 똥과 싸우면 너도 똥이 된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인간 세상이다. 살다보면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지만, 나의 기준(철학)에 맞지 않는 사람,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 나를 해코지 하는 사람 등 냄새나고 지저분한 똥 같은 사람을 수시로 만난다. 겉으로 웃으면서 나의 것을 뺏으려고 덤비는 자, 알량한 권위로 복종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가르치고 훈수 두려는 사람, 자기 이익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배신 때리는 사람, 겉으로 따르면서 속으로 딴 마음 품고 기회를 엿보는 조직원들, 일반 상식과 정서를 위반 하는 사람 등 냄새나고 지저분한 똥 같은 사람을 만난다.


똥 같은 사람을 만나거나 똥 같은 일(사기, 무시, 손해, 과실 등)을 당하면 내공이 약한 사람은 이성과 감정이 합선되어 바로 분노하고, 에너지를 뺏기고, 심한 상실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아무리 향기로운 사람도 내장에 똥을 지니고 있듯, 아무리 조심을 해도 똥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운명이다. 살면서 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방어하느냐에 따라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마음의 독이 되기도 한다. 똥을 만나도 차분하게! 단호하게! 대응하는 요령을 살펴보자.


똥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마라. 똥은 배설이라는 자연현상이다. 똥은 기름지고 향기로운 음식이 소화되고 남은 찌꺼기다. 똥이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직 분해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똥도 분해가 되고 자기 자리를 찾으면 거름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도 똥이 더럽고 나쁘다고 취급하는 것은 자기 기준이 만든 색안경 때문이다. 똥을 보는 순간에 선악에 잡힌 인식은 ‘똥은 나쁘다.’라고 편견을 갖지만, 전체를 보는 사람은 ‘똥이다.’라고 객관적으로 보고 ‘이 똥을 필요로 하는 곳, 똥이 약이 되는 곳은 어딜까? 어디로 치워야 좋을까?’ 라고 조화를 생각한다. -


똥과 싸우지 마라. 길을 걷다가 똥을 무심히 밟았다고 해서 똥과 싸우는 사람은 없다. 살다보면 예절과 배려심이 없고,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남을 어렵게 하고, 고의적 악의로 무한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때 자존심과 분노 때문에 다투거나 역정을 내지 말라. 그냥 마음속으로 “오늘 똥 같은 사람을 만났다. 똥은 건드리면 냄새나니 부딪히지 말자.” 라고 위안하며 자리를 피해야 한다.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 싫어서 말이다. 똥은 아무리 건드려도 똥의 본질이 바뀌지 않고 냄새만 더 날 뿐이다.


똥을 밟지 마라. 길을 걷다가 멀리 있는 똥을 발견할 수 있다. 보기에도 역겨운 똥을 굳이 찾아가서 밟는 사람이 없듯, 상대할 대상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거나, 뭔가 나쁜 의도를 갖고 수작을 부리거나, 자기만의 욕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의협심과 정의로움 때문에 바로 상대를 하거나 고쳐주려고 하지 마라. “똥을 건드리면 냄새나고, 똥을 밟으면 내 발도 더러워진다. 똥은 그냥 두면 썩어서 두엄이 된다.” 라고 생각하고 부딪히지 않아야 한다. 정의로운 기운을 똥에게 선사하더라도 똥은 꽃으로 바뀌지 않는다. 똥을 밟으면 나도 똑같이 똥이 되므로 똥은 절대로 밟지 마라. 똥은 똥파리에게 뜯어 먹히고, 비바람에 썩으면서 서서히 두엄으로 변한다. 똥을 분해하는 것은 시간이다.


똥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옮겨라. 그러나 그 똥이 집 정원, 자주 가는 길, 집 주변에 있다면 그 똥은 성격이 다른 똥이다. 똥을 외면하고 밟지 않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악취가 생활을 어렵게 하므로 바로 치워야 한다. 내가 발견한 똥 같은 존재가 함께 일하는 조직원, 매일 보아야 할 가까운 사람이라면 내 손에 똥을 묻히더라도 똥을 치우거나 똥을 필요로 하는 두엄 장소로 옮겨야 한다. ‘길에 놓인 똥을 치우지 않으면 누군가 밟는다. 똥이 어울리는 곳으로 치워주거나, 똥을 필요로 하는 퇴비장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명감과 희생, 인내심이 필요하다. 똥 같은 존재를 밝은 쪽으로 선도하면서 탈바꿈시키려면 아마도 살신성인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진짜로 두려운 똥은 인위와 비이성이 만든 나의 똥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온전하지 못하다. 내 속에, 나도 모르게 존재하는 똥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이익 집착이 만드는 대인갈등, 나의 욕심을 분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부딪힘과 대립,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나의 기준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독선 등 나의 부실로 인한 똥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지렁이도 자기 기준 대로 기어가듯, 인간도 자기 가치관(철학)이 만든 기준을 따라가는데, 자기 기준과 색안경,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대가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상대를 똥 취급하는 일이 있다. 두려워하고 경계할 일이다. 대인관계에서 다툼을 줄이고, 영혼이 상처입지 않으려면 두뇌가 정한 선∙악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고, 서로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뜻을 이룬다.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 고통을 주는 대상도 나의 반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살기 위해서 말이다.